송경화 개인전
M Gallery, CICA Museum
September 28 – October 2, 2022
2022.09.28 – 10.02
온기와 움직임
실존의 감각체, 카오스가 열리다
이 재 걸 ∣ 미술평론
세계는 ‘흐름 속에’ 있다.
생성하는 어떤 것으로서, 결코 진리에 다가가지 못하고 늘 새롭게 밀려나는 허위적인 것으로서 말이다. 왜냐면, ‘진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Friedrich Nietzsche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현실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문명의 시대, 말하자면, 파편적 정보가 우리의 총체적 삶을 규정하는 시대, 끝없이 복제되는 시뮬라크르들(simulacres)이 자연의 이미지를 대 신하는 이 시대는, 시인(詩人)의 느릿한 언어로 노래하기엔 너무나도 빠른 템포를 가졌다. 다가가려 하 면 다른 사건을 잉태하고, 소유하려 하면 이미 유물이 되어 있다. 차가운 감성이 뜨거운 이미지들로 둔갑하여 우리의 현실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새로운 소통방식과 이미지의 과소비에 열광하 지만, 실존의 광휘(光輝)나 감각의 역동은 점점 더 무뎌지기만 한다. 물론, 이런 현실이 부정적인 것만 은 아니다. 인류의 진보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유리한 윤리이고, 그 자체로 유익한 아이디어가 아니었 던가. 하지만, 이 물질적 풍요의 발전사 앞에 잠시 멈춰서서, 우리의 정신적 삶도 풍요로워졌는지를 자 문해 보자. 왜 ‘나’의 소외감은 더 커지고, 왜 ‘나’의 감각은 점점 더 외부의 감각, 가상의 흥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지를 말이다. 혹시 우리는 사물의 차가운 체온 속으로, 기계적 인과성의 극한(極 限) 속으로 내던져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송경화의 회화는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착각이 사실과 거의 동등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이 진 보의 신화 속에서 ‘살아 있음’의 증명은 점점 더 힘겨워지고 있다. 작가의 그림은 그래서 실존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감각의 이념적 환원보다는 감각의 층위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세계를 체험하 는 과정에 주목한다. 일찍이 들뢰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가 예술을 물감, 캔버스, 선, 단 어들, 리듬들 등과 같은 재료를 사용해 ‘감각 작용을 해방’하는 것으로 정의한 바 있지 않던가. 이때 감각 작용은 “다른 질서에 속하며, 물질이 존속되는 한 그 자체 안에 하나의 실존을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의 회화는 생각하는 주체(thinking subject)가 아니라, 행동하고 느낌으로써 체험하는 주체 자(master), 즉 실존체에 가깝다. 얼핏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도 보이지만, 작가가 드러내고자 한 것은 충동 이전의 원초적 본성이며 폭력 이전의 비폭력적 동기였다. 그렇게 작품은 외관의 몰락을 허용하 고 카오스(chaos)를 향한다. 엔트로피(entropy)의 극적인 증가와 자연의 생동(生動), 불확정적이고 무 한한 신성(神聖)과 광활한 우주적 공포, 자유롭게 방사하는 빛과 영혼의 리듬감…, 작가는 이 모든 실 재의 초월적 표현을 ‘카오스적 관계 맺기’로 구현한다. 인위(人爲)에 머무를 필요도, 질서의 권력을 탐 할 이유도 없다. 창조적인 흐름으로서, 말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세계의 대담한 노출로서, 천연의 색(色)과 형(形)을 빌린 송경화의 실존적 감각체는 눈의 질서에는 억압적일지 몰라도, 정신에는 이미 아름답기 그지없다. 고정된 진리는 망각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진리는 찰나(刹那)이고, 과정이며, ‘근사치’일 뿐이기에 이 세 계는 예술가에게 끝없는 영감을 선사한다. 예술가는 생존하기보다는 실존해야 하며, 닫힌 진실의 고요 함보다는 열린 진실의 번잡함을 옹호해야 한다. 수많은 영감과 미감의 변주(variation) 안에서, 춤추는 사유와 탈주하는 운동의 초월적인 흐름 안에서, 송경화는 카오스를 감각하고, 그 감각적 심상에 질료 를 입힌다. 선들은 무한의 소용돌이로 미끄러지고, 색들도 카오스의 ‘말러리슈’(malerisch; 회화적 감각 덩어리)로서 영원한 분산(分散)의 흥분을 감추지 않는다. 마치 우주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오듯, 세계 의 잠재성은 현실을 뚫고 우리의 영혼에 쏟아져 내린다. 이 신비로운 사건을 꼭 붙잡은 작가의 회화는 ‘살아 있다’라는 풍요로운 실존 감각을 축제처럼 내뿜는다. 이제 작품 앞에서, 그 고도의 원초성(原初 性) 앞에서, 현실의 혼탁함은 걷히고 무언가 명료해지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송경화의 초대에 기꺼이 응한 우리에게, 카오스가 열린 것이다.
21세기 첨단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내일을 알 수 없다. 삶은 불확실성 속에 던져져 있고, 예측과 계획은 어긋난다. 나는, 예측할 수 없음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며 작품을 시작한다. 사건의 시작은 빅뱅처럼 우연에서 출발한다. 주사위를 던지듯 물감을 던진다. 어떤 패가 나 올지 알 수 없는 상황, 그저 작은 실마리 하나를 가지고 그 다음 스텝을 밟아나간다.
심장 박동, 파도, 달의 변화, 중력… 당연하게 여기며 지나치는 것들 속에 있는 강력한 힘은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이다. 에너지들은 서로 만나고 충돌하며 그 힘이 상쇄되기도 하고 배가 되기도 한다. 몸의 움직임과 중력에 따라 물감이 반응하며 만들어내는 형상들은 내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질문한다. 그렇게, 우발점으로부터 생성된 사건이 질료를 입고 회화라는 형식으로 생산된다.
자연계의 치열한 생명력 속에서, 한 존재의 삶 속에서, 급변하는 도시에서, 몸과 몸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이루어지는 춤 속에서 섬세하고도 역동적인 에너지를 감각한다. 몸은 한 존재가 세계를 만나는 통로이다. 나의 작품에는 신체와 시간의 궤적이 담겨있다. 내가 감각하는 세계는 질서 정연하게 구성된 세계가 아닌, 혼란과 혼돈의 카오스이다. 그리고 이 카오스에서 어떠한 리듬을 건져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