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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 이슈: 예쁜 작품이 좋은 미술일까 [KOR]

    작품을 만들 때 작가는 종종 고민에 빠진다. 나를 표현할 것인가, 소비자를 고려할 것인가, 현대 미술의 맥락에서 만들어야 할까 – 그렇다면 현대미술의 맥락은 대체 무엇이며 서양에서 나온 현대미술의 맥락을 지구 반대편에 붙어있는 이 한국땅에서는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걸까.

    사실상 현대미술은 몇몇 지역에 시장이 집중되어 있고 그 외 모든 지역은 그 조그만 지역들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고있지 않으면 안되는 기이한 구조로 형성되어있다.

    단지 ‘미술’- Visual Art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마존 원주민도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몸을 치장한다. 미술은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글도 배우기 전에 엄마를 그릴 줄 알며 청소년기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누구나 상대를 그리게 되는 것이다.

    반면 현대미술 – Contemporary Art는 대체 무엇인가? 말을 직역하면 단지 현대의 미술이지만, 사실 이 단순한 단어 뒤에는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복잡하며 꼬일대로 꼬인 정치 문화 경제적, 또한 인종적 힘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많은 작가들이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랑을 하듯 타고난 재능에 의해 본능적 끌림으로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대부분이 경험하는 것은 거대한 –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지역적, 문화적, 인종적인 벽.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배경은 벽이 되어버린다.

    ‘작가’- Artist라는 환상은 누가 만들었나? 미국에서는 Artist와 artist를 의미적으로 구분한다. 소문자로 쓴경우 단순히 미술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Artist라는 것은 “예술가”를 의미하는데 즉, 무엇인가 ‘가치있는’ 미술을 한다는 것이다. 가치있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개념이다. 내가 어려서 친구와 주고 받은 편지들이 나에게는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그저 종이 조각일 뿐 아닌가. 결국 우리가 대단한 거장이라고 하는 몇 안되는 서양작가들의 습작, 물건 하나하나가 가치있는 이유는 그들의 흔적이 우리들의 흔적보다 더 “가치있다”고 누군가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대미술과 서양미술사를 우리가 모두 무시하고 우리만의 미술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대답은 다양하게 나올 수 있겠지만 나의 개인적인 의견은 No이다. 역사의 맥락상 한국은 이미 서구화된 사회이다. 학문적 기반 또한 서양의 것으로 대체되고 우리는 서양의 ‘해석된’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교육받고 가치관을 형성했다. 또한 경제적인 관점으로 봤을때에도 현대미술 시장은 무시하기엔 너무 큰 시장이며 잠재적 파급효과 또한 엄청나다.

    서양현대미술을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의 색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공식을 완전하게 이해했을 때 그 겉모습만 흉내내는 것이 아닌 그 공식을 이용해 정말 우리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의 공식이란 언어와도 같다. 그 틀은 이미 정해져있다. 어느정도 맞추어 주어야지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틀을 맞춘다고해서 내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결국 현대미술을 배운다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개인적인 이슈를 비밀스러운 언어로 표현하는 법과 또한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 언어를 배우면 누구나 현대미술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맥락으로 봤을 때 “현대작품”이란 시각적 언어로 나누는 철학적인 대화이다. 작품에 들어가는 모든 요소는 작가가 관객에게 던지는 단어 또는 느낌 하나 하나이다. 관객은 작품을 시간을 두고 살펴보면서 그러한 의미와 느낌을 느껴보는 것이다. 영화에 멜로물만 있지않고 스릴러나 공포물, 액션 판타지도 있지않은가.

    현대미술이란 삶을 다루는 언어와도 같아서 예쁜 작품도 있을 수 있고 우울한 작품도, 잔인한 작품도 있을 수 있다. 삶이 그러하듯 말이다. 현대미술이 모두 “예쁜 작품” 만 있다면 그것은 한가지의 사고방식과 양식을 한정짓는, 오히려 “현대미술”의 개념에 반하는 것이 된다. “예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오히려 소비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디자인에 가까운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관객을 생각하게 하는 대화의 대상이 아닌, 관객을 보다 편안하고 만족감을 주는데 초점을 둔다는 의미이다.

    2014년 1월 30일
    김리진
    cica_email

    참조:“두 남자는 왜 경남도립미술관 뒤쪽에 버려졌을까” 연합뉴스 2011년 8월 4일